에그EGG #16 by 비와이슬


  가희의 입가에 순간적으로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건방지다. 아니, 오만하다. 하긴 귀족은 원래 오만한 족속이지. B는 귀족이다. 연예인은 귀족인 것이다.
  B는 우아한 걸음걸이로 가희에게 다가가 잔을 내밀었다.
  “한 잔 드세요. 목이 마르실 것 같은데…….”
  “고맙습니다만 근무 중입니다.”
  가희는 정중히 거절했다. 바로 앞에 서자 B는 생각 외로 키가 컸다. 가희보다 5센티는 큰 것 같았다. 하지만 늘씬한 체형이라 파워슈트를 입고 있는 가희보다 훨씬 약해 보였다.
  “아, 그럼, 미안한데 이것 좀 들어 주시겠습니까?”
  B는 태연하게 웃으며 가희에게 잔을 내밀었다. 수작이 뻔히 보였지만 손님이 정중히 요청하는 것을 거절하기도 곤란했다. 가희는 왼손으로 그가 내미는 샴페인 잔을 받았다. 그리곤 바로 지나가는 웨이터리스의 쟁반에 올려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B가 쓴 웃음을 지었다.
  “저는 잠시 들고 있어 달라는 뜻이었습니다. 버리라는 뜻이 아니구요.”
  “샴페인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필요하시면 갖다드리겠습니다.”
  “여전히 냉정하시군요.”
  “저를 본 적이 있으십니까?”
  “네. 각하께서 제 공연을 보러 오셨을 때 보았습니다. 무척 아름다우시더군요. 특히 건강한 아름다움이 눈이 부셨습니다. 너무 찬란한 아름다움이었지요. 초원을 호령하는 암사자의 위엄 같은 것도 느껴졌습니다. 흔히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이지요…….”
  “전 당신의 놀림거리가 아닙니다.” 가희가 말을 끊었다.
  “놀리다니요. 전혀 아닙니다. 당신은 몹시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특히 당신의 건강한 아름다움은 저를 부끄럽게 하지요. 당신은 분명 저보다 육체적인 능력이 강할 테죠?”
  B는 진심으로 부러움을 드러내며 말했다. 그의 얼굴엔 가희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이 어려 있었다. 가희는 일순 이 사람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그런 감정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화가 났다. 가희는 자신의 얼굴이 못 생겼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또 빼어난 미인이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저 보기 싫지 않은 적당한 얼굴이었는데 이 남자가 지금 자신을 아름답다고 찬사를 늘어놓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남자의 얼굴은 정성스레 세공한 조각 같았다. 곧고 오똑한 콧날, 깊숙이 박혀있는 눈, 짙고 검은 눈썹, 얇으면서도 단단히 맞물려있는 입술은 언제라도 아름다운 목소리를 토해내며 마음을 흐트러트릴 것 같았다.
  B가 말을 이었다.
  “저는 강한 사람이 좋습니다. 부럽지요. 특히 건강하고 활기찬 아름다움을 가진 여성은 너무 사랑스럽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이런 식인가요? 불편하네요. 미안합니다만 전 근무 중입니다. 다른 분들과 대화를 나누시죠.”
  “당신을 스카웃하고 싶습니다!”
  B의 폭탄선언 같은 말에 가희는 일순 대답할 말을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곧 피식 웃었다.
  “다른 곳에서 알아보십시오. 전 관심 없습니다. 더 이상 저를 귀찮게 하시면 끌어내겠습니다.”
  가희가 엄포를 놓자 B의 섬세한 얼굴이 난감하다는 듯 일그러졌다. 그때 가희의 귀 속에 있는 무전기에서 명령이 들렸다.
  [각하께서 비밀면담이 있으시다.]
  가희는 즉시 대통령이 있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대통령은 이쪽을 빤히 보고 있었다. 자신과 B가 대화를 나누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보여주지 말아야 할 모습을 보여준 것처럼 부끄러움을 느끼며 가희는 대통령이 있는 곳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B는 샴페인을 들이켰다. 파워슈트를 착용하고 있음에도 드러나는 그녀의 몸매가 강하게 기억에 남았다. 시야가 몽롱하게 느껴졌다. 공연 전에 먹었던 약물에 알코올이 더해지자 시야가 흔들렸다. 그래서인지 방금 사라진 경호원이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아직 그녀의 이름도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바보. 이름도 안 묻다니…….”
  B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술을 들이켰다. 곧 모르는 여자들이 그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가희는 대통령을 모시고 2층에 있는 접견실로 향했다. 청와대 안이니 특별히 위험할 일은 없었지만 몸에 밴 동작으로 대통령 앞서 걸었다. 대통령의 뒤에는 대통령실장과 한 명의 경호원이 따랐다. 대통령실장은 40대 초반의 여성으로 자그마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이름은 김윤미. 언제나 조용히 자신의 할 일만 하는 사람으로 대통령에게 불편을 끼치는 일을 제일 싫어했다. 지금도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대통령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접견실 문을 열자 안에는 이미 손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 명의 중년 외국인이 앉아 있다가 일어나 대통령을 맞았다. 그 옆에 있던 마담 리즈도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얼굴엔 여전히 ‘미스틱’가면이 씌워져 있었는데 지금은 20대 초반의 여인 모습이었다. 그녀는 대통령과 독대할 때를 제외하곤 자신의 진면목을 보이지 않았다.
  대통령이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대통령실장이 뒤따라 들어가고 가희와 한 명의 경호원은 접견실 문을 닫고 문 밖을 지켰다.
  “처음 뵙겠습니다. 로렌스 서머스입니다. 이렇게 만나주셔서 감사합니다.”
  잿빛 머리의 백인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백인의 말과 행동은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경망스럽거나 천박하지 않은 우아한 몸짓과 목소리. 호의를 머금은 입가의 미소에다 사람 좋아 보이는 편안한 인상까지 마치 친한 이웃집 아저씨를 대하는 것 같았다.
  “반갑습니다. 장수진입니다.”
  대통령이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은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나눴다. 대통령이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대통령이 앉자 로렌스 서머스와 마담 리즈도 자리에 앉았다. 대통령실장은 조용히 대통령 옆에 앉아 메모를 준비했다. 마담 리즈와 대통령실장은 서로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말문을 연 건 대통령이었다.
  “무슨 일 때문에 저를 보자고 하셨습니까?”
  “한 가지 요청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로렌스 서머스가 웃으며 말했다. 한국말이 무척 능숙했다. 장수진과 마담 리즈가 관심을 표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각하께서 준비하고 계신 ‘일렉트릭웹 (Electric-web)’ 프로그램을 중지시켜 주셨으면 합니다.”
  로렌스의 말에 장수진은 순간적으로 표정이 굳었다. 전혀 내색하지 않고 있던 마담 리즈의 눈빛도 날카롭게 빛을 발했다. 가면 때문인지 표정의 변화는 없었지만 로렌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말이 주는 충격을 되새기고 있는 것 같았다.
대통령은 순간적으로 굳어졌던 표정을 풀고 웃었다. 소리 내어 웃었다. 카랑카랑한 웃음은 기분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웃는 동안 대통령은 할 말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웃음을 그치고 대통령이 물었다.
  “그건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세계가 한국을 주목하고 있지 않습니까? 특히 IT와 스마트폰, E-net까지 한국의 동향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저희 같은 컨설팅 회사들은 다양한 정보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야 고객들에게 좋은 제안을 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게 뭔지 알고 있으면 나에게 좀 들려주세요. 자세히 듣고 싶네요. 나도 자세한 건 모르니까요.”
  대통령이 웃으며 말했다. 상대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탐색하기 위한 요청이었다. 로렌스 서머스는 대통령의 속셈을 익히 알 텐데도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더 잘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만 각하께서 요청하시니 아는 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렉트릭웹’은 E-net을 활용하기 위한 신기술입니다. E-net이 전력과 인터넷 정보가 같이 전송된다는 건 잘 아실 거라 믿습니다. ‘일렉트릭웹’은 전기를 화폐처럼 지불하는 시스템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사용자가 특정 사이트나 블로그 같은 것에 접속할 때 자동으로 적은 량의 전기를 송전해주는 시스템입니다. 아주 적은 양의 전기지만 그것을 특정 사이트에게 비용으로 지불하는 것이죠. 특정 컨텐츠를 보거나 게임이나 프로그램을 구입할 때 돈을 지불하는 것처럼 전력을 대신 지불하는 시스템입니다. 각하께서 전 세계에 E-net를 전파하고 특허료를 아주 저렴한 값에 넘긴 것도 이 시스템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반대를 무릅쓰고 각 가정에 수소연료전지셀을 보급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라고 생각됩니다.”
  “설명 잘 들었습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이 다 맞다고는 할 수 없지만 꽤 많이 알고 계시는군요. 하지만 왜 그것을 중단해달라고 요청하는지 이해할 수 없네요. 그리고 컨설팅 회사가 한 나라의 정책에 대해 간섭을 하는 건 도가 지나친 것 같습니다만…….”
  대통령은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하지만 조금 딱딱한 느낌을 감추지는 못했다.
  “도가 지나쳤다면 죄송합니다. 정중히 사과드리겠습니다.”
  로렌스는 사과조차도 품위가 있었다. 결코 비굴하지도 가볍지도 않으면서도 사과의 뜻을 전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저희는 작은 컨설팅회사가 아닙니다. 저희는 각국의 정부에게도 컨설팅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제가 하는 말을 각하께서도 좋은 컨설팅 회사와 상담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말씀해보세요.”
  “‘일렉트릭웹’은 아주 곤란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국경이 없다는 점이지요. E-net를 통해서 전 세계의 정보를 접할 수 있는 것처럼 ‘일렉트릭웹’을 통해 전 세계의 전기를 뺏어올 수 있습니다. 결국 한국과 미국처럼 문화 컨텐츠가 발달한 나라들만 이득을 보게 될 것입니다. 당연히 다른 나라들의 심한 반발을 불러 올 것입니다. 아주 강한 반발을 불러오게 될 것입니다. 자신들의 의도와 관계없이 전기를, 에너지를 빼앗기게 될 것이니까요.”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당신의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지요. 하지만 지금도 애플을 비롯한 초거대 다국적기업들이 앱스토어 같은 것으로 외국에서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고 있지 않습니까? ‘국경 없이’ 말입니다. 우린 그걸 막을 생각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일렉트릭웹’도 동일한 개념입니다. 신용카드로 비용을 지불하는 것 대신 좀더 편하게 지불되는 것뿐이지요.”
  “‘일렉트릭웹’은 개인 블로그에 접속해서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전기를 빼앗아갈 수 있습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큰 혼란이 초래될 것입니다.”
  “파워블로그들은 꼭 그 방법이 아니라도 지금도 여전히 수입을 얻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만 그건 파워블로그 수준이 아닙니다. 전 세계 각국으로부터 에너지를, 전기를 비용으로 요구하는 것이니까요. 전기가 부족한 나라들은 심하게 화를 낼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너무 과장이 심한 것 같습니다. 좀 불편한 말이군요.”
  대통령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결국 음악과 영화, 드라마 등 문화 컨텐츠를 장악한 나라에 에너지가 집중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클릭 한 번에 정확히 얼마만큼의 전기가 전송되는지 느끼지도 못하겠지요. 하지만 어느 순간 인지하게 됩니다. 전기요금이 폭증했다는 것을, 국가도 알게 될 것입니다. 전기가 부족하다는 것을.”
  “너무 과장이 심한 것 같습니다. 아직 시작도 안한 기술로 마치 외국이 망하기라도 할 것처럼 이야기하는 군요.”
  “네트워크상에서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빈부의 격차가 극심해질 것입니다. 컨텐츠 생산자, 유명 디자이너, 아티스트, 포털 사이트 등이 권력자로 떠오르겠지요.”
  “‘있는 자는 넉넉하게 되고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긴다’(주10)는 말은 몇 천 년 전부터 있던 말입니다. 부의 집중은 어쩔 수 없다는 뜻이죠. 그걸 최소화하기 위해 국가가 있는 것 아닐까 합니다. 국가가 필요없다는 자들도 있지만 말입니다. 난 ‘부의 집중’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노력할 것입니다. 하지만 외국까지 배려할 정도로 그릇이 크지는 않습니다.”
  대통령이 거절의 뜻을 분명히 했다. 하긴 일개 컨설팅 회사의 대표가 와서 반대한다고 해서 따를 일도 아니었다.   그때 여태까지 가만히 듣고만 있던 리즈가 처음으로 로렌스에게 물었다.
  “당신 의견은 석유업계 의견과 같습니까?”
  “글쎄요. 저에게 석유업계에 대해서 물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우리 정보가 부족했나요? 당신이 석유 메이저들과 친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아, 컨설팅해주는 회사 중 일부일 뿐인가요? 그럼 그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당신의 생각을 좀 나누어주시겠습니까?”
  마담 리즈가 눈을 빛내며 대답을 기다렸다. 로렌스는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음, 대체로 비슷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군요……. 월스트리트를 비롯한 금융계는 어떨까요?”
  마담 리즈가 다시 물었다. 로렌스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비를 걸려는 것인지 살펴보는 것 같았다. 리즈는 표정의 변화 없이 미소를 지은 채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통령과 대통령실장도 흥미로운 듯 두 사람을 쳐다봤다.
  “마찬가지로 반대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화폐 제도에 혼란이 올 테니까요. ‘일렉트릭웹’이 전 세계에 퍼진다면 각국의 통화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로렌스 서머스의 조용하지만 단호한 말에 대통령을 비롯한 사람들 표정이 굳어졌다. 전기 자체가 화폐 역할을 하면 환율 같은 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그것이 가져다 줄 충격은 얼핏 상상이 가지 않았다.


주10) 예수가 한 말임. 마태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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