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용 수소연료전지는 대체로 케비넷만한 크기였는데 자동차에 기름 넣듯 수소를 넣어주면 공기 중의 산소와 함께 태워서 전기를 생산했다. 이 과정에서 열과 이물질이 전혀 없는 순수한 물이 생성되었다. 이 열을 다시 흡수하여 전기 생산에 이용하기도 했고 온수를 만드는데 사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생성된 순수한 물은 식수로 사용했다. 문제는 연료가 되는 수소를 만들려면 역시 전기나 다른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석유는 석유정점이 지나 가격이 폭등했고 무엇보다 환경을 오염시켰다. 바이오연료는 효율에서 이점이 없었다. 바이오 가스는 겨우 태양에너지의 0.17%만 이용하는 효율을 보여주었고 바이오 디젤은 0.11%, 바이오 에탄올도 0.18%에 불과했다. 태양광 발전의 효율은 약 15%니 효율이 아주 낮았다.(주7) 하지만 바이오연료를 생산하는 작물은 넓은 땅과 기후만 있다면 그다지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자라게 마련인데, 기상이변으로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원자력은 사고가 발생할 경우 방사능 누출이라는 재앙이 발생했고 사용후 핵폐기물을 처리하는 문제가 있었다. 무엇보다 국민들이 좋아하지 않았다. ‘핵’이란 단어 자체가 죽음을 연상케 하는지도 몰랐다.
상업적인 태양전지는 15~20%의 효율에 도달하고 수명도 약 20년에 달하지만 값이 비싸고 제조비용이 많이 들어갈뿐더러 기계적으로도 취급하기가 까다로웠다.(주8) 또 넓은 땅이 필요했다. 풍력발전은 바람이 많은 지역이라야 하고 소음문제를 발생시켜서 사람이 살지 않은 빈 땅이라야 했다.
이런 이유로 기후온난화를 비롯한 오염문제가 있음에도 석유가 주된 에너지로 사용되어 왔는데 드디어 석유 가격이 태양광 발전 가격에 육박할 정도로 치솟은 것이다. 결국 탄소 에너지 시대에서 수소 에너지 시대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장수진 대통령과 정부는 수소연료전지 보급에 나섰다. 각 가정마다 자체발전이 가능한 연료전지 발전시설을 공급했다. 각 가정이 자체 발전시설을 갖추는 셈이었다. 각 가정은 전기가 남으면 오히려 한전에 전기를 송전해 주고 돈을 받았다. 발전이 불가능하거나 수소가 떨어진 가정은 다른 가정에서 생산한 전기를 공급받을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엄청난 비용문제와 수소의 폭발위험으로 인한 극심한 반대에 부딪쳤다. 장수진은 밀어붙였다. 연료전지 생산회사에 대한 특혜시비, 연료전지 기술을 가지고 있는 외국 업체의 로비설, 관련자의 뇌물 스캔들 같은 악재까지 괴롭혔지만 대통령은 굴복하지 않았다.
수소는 원래 저장과 수송, 보관에 문제가 있었다. 수소 1g의 열량은 120kJ에 달한다. 메탄은 약 50kJ, 석유 42kJ, 석탄 29.3kJ, 갈탄 20kJ 정도의 열량을 발생하기에 수소는 아주 뛰어난 연료였다. 하지만 수소의 부피는 메탄보다 거의 네 배나 커서 저장하기가 곤란했다. 또 수소를 액화시킨 액화수소는 끓는점이 영하 252.7도인데다 인화폭발성이 강해서 몹시 위험했다. 이 문제는 과학자들이 어느 정도 해결했는데 수소를 저장하는 신물질을 개발한 것이다. HNC(Hydrogen Nano Cage) (주9)라는 신물질은 기체인 수소를 흡착해서 고체 상태로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국민들은 폭발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언제나 그렇듯이 언론은 자극적인 기사만 토해내면서 국민들의 불안감을 자극했다. 특히 두려움이 많고 신기술에 따른 변화를 싫어하는 노령층과 안정감과 평안함을 최우선시하는 여성들이 강하게 반대했다. 또 HNC가 필요하다는 것 때문에 HNC 생산회사에 대한 특혜시비까지 불거졌다.
이 모든 어려움에도, ‘국민을 위험하게 만드는 마녀’라는 욕을 들으면서도 장수진은 굽히지 않았다. 장수진과 정부는 장점을 강조하고 홍보하는데 주력했다.
여유 전력이 있을 때는 그 전력으로 물을 전기분해해서 수소를 생산해 저장한다. 전력이 모자랄 때는 저장해둔 수소를 보급한다. 수소만 저장해두면 정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또 대통령 장수진은 새로운 비전과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건 이미 세계에 특허를 가지고 있는 한국의 E-net(인터넷과 전력망이 합쳐진 네트워크)과 각 가정에 보급된 수소연료전지 발전시설을 이용한 야심찬 계획이었다. 세계를 상대로 벌이는 계획. 이미 준비하는 기업은 특허를 출원 중이었다.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세계를 향해 모습을 드러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기치 않게 EMP테러가 발생했고 폭발사고가 발생했다. 곤란했다. 대형 폭발사고라도 나면 온갖 애를 쓰며 억눌러온 국민들의 불안감이 터져나올 수 있었다.
“이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해줘요. 이 일은 내가 죽기 전에 꼭 이루고 싶은 일이에요.”
“아직 죽기에는 너무 젊으세요.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리즈가 단호하게 말했다. 다분히 꾸중하는 듯한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장수진은 미안한 듯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대통령을 무안하게 해서 좋을 건 없었다. 리즈는 다음 말을 이었다.
“다음 대선도 준비하셔야죠. 다른 곳에선 절대로 그런 약한 소리 하지 마세요.”
“아직 시간 남았어요. 너무 조급한 것 아니에요?”
“전혀 아닙니다. 지금부터 준비해야합니다. 지금부터는 권력이 없다고 생각하셔야 해요. 다들 딴 생각을 할 테니까요. 각하께서 갖고 계신 꿈을 이루시려면 반드시 다음 정권도 잡아야합니다. 반드시요! 그렇지 않으면 추진하던 일들은 전부 물거품이 될 겁니다. 잘 아시잖아요? 누구도 앞 정권의 뒤치다꺼리나 하기는 원치 않습니다.”
“알았어요. 리즈만 믿어요.”
대통령이 웃으며 리즈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을 쓰다듬으며 고마움을 표시하자 리즈는 아무렇지 않은 듯 덤덤히 입을 열었다.
“일단 테러범을 잡는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좋아요.”
“만나셔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리즈의 말에 장수진은 호기심어린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로렌스 서머스라고 BHR컨설팅 회사의 대표입니다. 외교관 초청행사때 같이 초청하겠습니다.”
“컨설팅 회사 대표라구요?”
대통령이 마뜩찮은 표정으로 물었다. 리즈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빅샷Big shot (거물이란 뜻)입니다.”
“컨설팅 회사 대표가 빅샷이란 게 믿어지지 않네요.”
“표면적인 직함은 그렇지만 세계 최대 투자은행인 메리너스의 실세입니다. 석유업계 메이저들과도 관계가 깊은 자입니다. 만나보시지요.”
“그래요. 만나는 거야 뭐 어렵겠어요? 근데 리즈가 먼저 주선한 건가요? 아니면…?”
“아닙니다. 그 자가 먼저 연락해왔습니다.”
“할 말이 있다는 뜻이군요.”
“무슨 말을 할지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은요. 괜찮아요. 리즈가 모든 걸 알 순 없잖아요. 곧 알게 되겠죠. 그 외에 알아야 할 일이 있나요?”
“없습니다.”
“좋아요. 국무회의때 봐요.”
대통령의 말에 리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개를 숙이고 집무실을 나섰다. 손목시계를 보았다. 겨우 15분이 지나 있었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대화를 위해서 일부러 오라가라 하다니……. 화가 났지만 권력이란 게 그런 거 아니겠는가. 체질적으로 전면에 나서는 수고로움과 번잡함이 싫어서 2인자로 있을 뿐이었지만 이럴 때는 짜증이 났다. 괜히 문 앞에 서 있는 수석경호원 가희까지 꼴 보기 싫었다. 가희가 보는 앞에서 리즈는 자신의 뒷목을 만졌다. 그의 얼굴에 씌워져 있는 가면이 스르르 움직이며 요염한 20대 여인의 얼굴로 변했다. 일부러 놀리듯 가희 앞에서 변화시킨 것이다. 가희는 새파랗게 젊은 얼굴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면서.
리즈는 찬바람이 도는 표정으로 복도를 걸어갔다.
청와대는 처음이었다.
화려하지만 품위 있고 격조 있는 실내장식과 세련된 미술품과 문양들, 그리고 은은히 들려오는 음악과 누구의 것인지 모를 향수의 향기까지. 즐거워야 했지만 전혀 즐겁지가 않았다. B는 청와대 본관 입구에 설치된 X선 전신투시기를 지날 때부터 기분이 나빠졌다. 전신투시기는 사람이 아닌 컴퓨터가 이상 유무를 검색한다고 들었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빴다. B는 자신의 신체를 누군가가 투시한다는 것 자체가 싫었다. 끔찍하게, 죽을 만큼 싫었다. 검색이 있다는 걸, 자신의 몸이 불구라는 것을 볼 수 있는 기계가 스캔한다는 걸 알았더라면 절대로 초청에 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거절할 수도 없었다.
임시로 마련된 출연자 대기실에는 B 외엔 아무도 없었다. 이미 메이크업도 의상도 헤어도 완료된 상태였기에 모두 내보내고 혼자만의 조용한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목을 풀었다. 남들이 들으면 이상하게 여길법한 소리를 내면서 음계를 오르내렸다. 어느 정도 되었다 싶자 발성을 멈추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긴장으로 뒷목이 뻣뻣해왔다. 신인도 아니건만 여전히 큰 무대와 중요한 사람들 앞에 설 때면 긴장으로 몸이 굳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손바닥을 펴 보았다. 땀이 축축하게 맺혀 있었다. B는 일어나지 않을 위험이지만 혹시라도 일어날지 모른다는, 부정적인 생각이 가져다주는 두려움이 싫었다. 망치면 어떡하지, 실수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들…….
B는 벌떡 일어나 한쪽에 있는 자신의 가방을 열었다. 작은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 약통을 꺼냈다. 조그만 열쇠고리처럼 생긴 약통은 아침, 점심, 저녁, 밤으로 나누어진 칸이 있었고 거기에 작은 알약들이 담겨 있었다. B는 열쇠를 꺼내 점심 칸에 들어있는 약과 밤 칸에 들어있는 약을 꺼냈다. 집중력 강화제와 신경안정제였다. B는 물을 가져와 약을 삼켰다. 집중력 강화제와 신경안정제는 같이 먹으면 곤란했다. 집중력 강화제는 정신이 또렷해지도록 각성효과를 불러일으키고 신경안정제는 날카로워진 신경을 무뎌지게 만든다. 어떤 게 더 강할까? B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또렷하면서도 평안하고 안정적인 상태는 이뤄지지 않을 것이니까. B는 다시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잠이 들 가능성은 전혀 없었지만 그래도 약효에 따라 성공할 수도 있었다. 가지고 다니는 약은 약 중에서 가장 강한 약들이니까. 곧 사람들이 깨울 것이다.
‘La Califfa’의 서정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음악이 B에게 흘러나왔다. 산들바람이 불어오듯, 외로운 자들의 영혼을 어루만지듯 여성 가수의 키에 맞춘 목소리가 파티에 참여한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했다. 잔잔함과 애잔함, 비극적 사랑의 가사, 그 아련한 슬픔의 감성이 사람들을 집중하게 하고 울리고 한숨짓게 했다.
파티장 한쪽에 서 있는 가희는 많은 훈련을 거쳤음에도 자꾸만 B에게로 향하는 시선을 돌리려 애를 썼다. 파티장에 와 있는 각국의 외교관들과 직원들, 외국 정부의 각료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숨을 죽이고 B를 바라보고 있었다. 덕분에 위험요소가 있나 살펴보는 수고가 덜어졌지만 자꾸만 자신도 B를 보고 그의 음악에 젖어들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는 아름다웠다. 남자에게 아름답다는 표현을 쓴다는 것이 그에겐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화려한 레이스가 달린 하얀색 블라우스는 심장 부근까지 풀어져 그의 가슴 골격이 언뜻 보였다. 예상외로 미끈하고 과하지 않은 근육이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은 강한 힘으로 오르내렸다.
‘La Califfa’가 끝나고 헨델의 ‘Lascia chio Pianga’가 이어졌다.
하얗게 빛나는 얼굴, 그 사이로 자리한 붉디붉은 입술. 왠지 모를 쓸쓸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저 남자는 정말로 슬픈 것일까? 아니면 카스트라토라는 운명 때문에 보는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까? 알 수 없었다. 그때 B가 똑바로 가희를 쳐다보았다. B와의 거리는 불과 7미터 정도.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너무도 분명하게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가희는 자신이 선글라스를 끼지 않았나 싶었다. 그런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B는 가희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마치 선글라스 뒤에 가려진 눈이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가희는 당황스러움을 털어버리고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 순간 파티에 모인 사람들이 가희를 쳐다봤다. 심지어 대통령까지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가희는 모른 척 다른 곳을 주시했다. 곧 사람들이 다시 B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가희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화가 났다. 마음 같아선 당장 달려가서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분명 그는 자기의 시선이 가져올 결과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의도적으로 가희를 놀렸다. 사람들이 쳐다보게 유도한 것이다. 기회가 된다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따지고 싶었다. 화가 났지만 그럼에도 B의 아름다운 미성과 끝없이 올라갈 것 같은 고음의 날카로움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정말 신이 내린 재능이 아닐 수 없었다. 문득 B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이 끝나고 사람들이 와인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다. B는 각국의 고위인사들로부터 많은 찬사를 받으며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사인을 요청하는 이들도 있었고 기념촬영을 청하는 이도 있었다. 꽤나 오랜 시간 주인공은 대통령이 아니라 B였다. B를 초청했던 대통령의 안색도 그리 밝아보이지는 않았다. 대통령은 여전히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바로 옆에서 모신 가희는 대통령의 심기가 좋지는 않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B가 사람들에게 실례를 구하며 움직였다. 가희는 짐짓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계속 모른 척 할 수는 없었다. B가 곧장 자신에게 다가왔다. 오면서 샴페인을 들고 있는 웨이트리스를 보자 자신의 잔 외에 한 잔을 더 집어 들고 가희에게 다가왔다.
(주7) 에너지의 미래, 페터 그루스·페르디 쉬트 엮음, 에코리브르.p.100~102 참고.
(주8) 에너지의 미래, 페터 그루스·페르디 쉬트 엮음, 에코리브르.p.126 참고.
(주9) 수소저장 신물질은 실제로 2012년 2월 한국에서 개발되었다. HNC라는 명칭은 임의로 지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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